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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인도차이나의 대국, 베트남은 왜 프랑스에 협력했나?

비나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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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차이나(Indochina)! 이국적인 낭만이 물씬 풍기는 단어이다. 붉게 노을 지는 메콩 강에 한가로이 노 젓는 뱃사공이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인도차이나는 최신 용어이다. 프랑스가 이 일대를 지배하며 부여한 19세기의 신조어였다. 얼핏 매우 편의적인 작명이 아닐 수 없다. 중국과 인도 사이의 지역이라는 뜻이니, 무성의하기조차 하다. 그럼에도 이 곳의 인문 지리를 절묘하게 포착한 말이기도 하다.

 

중화 문명의 자장 속에 자리했던 베트남과 인도(불교/힌두) 문명의 영향이 강했던 라오스와 캄보디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도차이나'라는 관념 및 발상 자체가 20세기의 역사를 추동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말이기도 하다.

 

대남제국과 인도차이나

 

오늘날의 베트남 영토에 통일국가가 들어선 것은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겨우 200년 전, 응우옌 왕조에 의해서였다(1802년). 베트남은 참파 왕국과 크메르 왕국을 향해 지속적으로 남쪽으로 팽창해가는 지역 대국이었다. 남진을 완수한 베트남이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캄보디아를 점령한 적도 있다. (☞관련 기사 : 같은 분단 국가? 그러나 달랐다!)

 

(참파 왕국은 오늘날 베트남의 중부 지역에 있던 인도네시아계의 참족이 세운 왕국이다. 크메르 왕국은 오늘날의 캄보디아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베트남 남부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편집자>)

 

1834년 민망(Minh Mang, 明命) 황제 때이다. 베트남인 관료를 파견해 세금을 징수하고 크메르인들에게도 베트남어 학습을 권장하기도 했다. 민망은 1838년 나라 이름도 다이남(Dai Nam)으로 고치고 이듬해부터 공식 국호로 사용했다. 남진과 서진을 통하여 월남(越南)이 대남(大南)으로 웅비한 것이다.

 

대남제국은 대청제국에 대한 문화적 자긍심이 넘쳤다. 만주족이 지배하는 청과 견주어서 다이남을 '중국(中國)'이라고 할 정도였다. 스스로 중화를 자처하고 자부한 것이다. 더불어 주변 소국들에 대한 독자적인 세계 질서도 구축코자 했다. 그래서 '남의 중화 제국'이라고도 하고, '대남제국 질서'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다만 대남제국 질서가 주변의 동의와 참여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다. 소프트 파워가 부족했다. 대국의 덕으로 소국의 예를 구했던 왕도(王道)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캄보디아의 저항으로 다이남은 1841년 프놈펜에서 물러나야 했다.

 

대남제국 질서가 실현되기에는 시간도 모자랐다. 전성기를 구가하려던 차에 프랑스가 등장한 것이다. 1858년이다. 그리고 1863년부터 통킹과 안남, 코친차이나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5개 지역으로 구성된 인도차이나연방을 구축해간다. 다이남이 남진했다면, 인도차이나는 북상했다. 인도차이나의 부상으로 다이남은 현실적 영역에서 잠식되어갔다.

 

그러나 대남제국은 사라지는 한 편으로 되살아났으니, 여기에 현대사의 커다란 역설이 자리한다. '인도차이나'의 속성에 대남제국의 흔적이 깊이 자리했던 것이다. 즉,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산물이되, 아무런 밑천 없이 상상되고 발명된 것만은 또 아니었다. 대남제국의 속성에 가탁하여 재구축된 것이다.

 

무엇보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인도차이나에 편입시킨 근거가 베트남이 양국을 속국으로 삼은 유산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나아가 대남제국의 수도 후에(Hue)가 자리했던 중부 지역 안남(安南)인들의 이해관계와 결부시켜 인도차이나를 건설해 갔다. 즉, 프랑스의 힘을 빌려 대남제국의 확장이라는 전통적 기획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프랑스-안남(Franco-Annamese) 협력'이야말로 인도차이나연방 건설의 중추였다.

 

1920년대부터 인도차이나를 종횡으로 엮는 교통망이 건설되고, 산업 기반 시설 또한 확충되었다. 이에 따라 안남인들의 서부 진출 또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일찍이 중국식 과거 제도를 도입했던 베트남의 관료제 경험이 크게 기여했다. 인도차이나를 경영하는 핵심 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 이미 라오스 관료의 절반 이상을 안남인들이 차지할 정도였다.

 

고등 교육의 제도적 변화도 기여했다. 1911년 하노이에 '인도차이나 대학'이 창립되었다. 반면 국자감은 폐쇄되었다. 자연스레 베트남 '신청년'들에게 인도차이나는 실체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만큼 '인도차이나인 의식', '인도차이나인 정체성'도 강화되었다. 그래서 일부는 식민지 현실을 망각하고 대남제국의 영광스러운 과거와 접맥시켜 인도차이나를 이해하는 착종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대남제국과 인도차이나연방 사이에는 묘한 연속성이 다분했다. 프랑스가 대남제국의 남진(Nam Tien)은 물론이요, 서진(Tay Tien)까지 물꼬를 틔워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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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과 인도차이나

 

흥미로운 점은 인도차이나라는 발상을 공유한 것이 프랑스 식민 통치에 협력한 이들, 즉 '친불파'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에 맞서 반체제 운동을 전개했던 저항 세력들 또한 반제국주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인도차이나 관념을 수용해갔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폭발하면서 등장한 '신청년 좌파'들 역시 적극적으로 '인도차이나 혁명'이라는 어휘와 발상을 흡수해 갔다. 베트남인의 남다른 역할을 강조하며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우월감을 공유했다는 점도 비슷했다. 유교 문명의 역사적 우월감과 프랑스의 식민 담론에 사회주의 국제주의의 사명감이 결합된 형태였다.

 

이들이 인도차이나 관념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에는 코민테른의 역할도 한 몫 했다. 코민테른은 아시아, 아프리카 혁명가들에게 그들이 저항하는 제국주의 국가의 경계에 따라 조직을 편성하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즉 '안남 공산당'이나 '통킹 공산당', '라오스 공산당'의 창설은 허용되지 않았다. '베트남 공산당' 또한 마찬가지다. 오직 '인도차이나 공산당'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자바 공산당'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공산당'만이 허가되었고, 나라 없는 조선인들은 일본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에 편입되어야 했던 것과 동일한 논리의 소산이다. 애당초 소련 자체가 연방주의 모델을 제공하고 있던 바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코민테른의 지도를 따라 1930년 창설된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인도차이나 독립 완수!"를 목표로 내세웠다.

 

다만 1890년생이었던 호치민은 '신청년'들과는 인문 지리적 감수성이 달랐다. 그는 국지적인 '안남 공산당'을 거절하면서도, '인도차이나 공산당' 또한 너무 넓은 개념이라고 여겼다. 그가 선호한 것은 역시 베트남이었다. 그래서 그가 주도했던 정당 역시 베트남 공산당이었고, 구호 또한 "베트남 독립 완수"였다.

 

대남(大南) 이전의 월남(越南)을 복원한 만큼,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독자성도 인정했던 것이다. 즉,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힘을 입은 신청년들의 기세에 호치민의 뜻이 꺾이면서 등장했음을 각별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당시 일부 신청년들은 호치민을 고루하고 편협한 민족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즉, '베트남'은 서구와 동구에 의해 동시에 억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베트남이라는 어휘를 인도차이나연방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여 금기시하였다. 반면 '신청년'들 또한 소련을 모델로 삼은 인도차이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Liên Bang Cộng Hòa Xô Viết Ðông Dương)을 염원했다. 양쪽 모두 대남제국을 좌·우로 계승한 '인도차이나파'였던 것이다.

 

붉은 대남제국

 

인도차이나연방의 실상은 프랑스-안남 연합에 의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식민화였다. 기실 인도차이나 모델은 그 출발부터 대남제국의 조락만큼이나 토대가 허약했다.

 

특히 유교 국가와 불교 국가라는 천년의 유산 차이는 삼국 지식인들의 행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판 보이 쩌우나 호치민이 일본과 중국을 향해 북상했던 것과는 달리, 라오스와 캄보디아 민족주의자들은 시암(태국)에서 학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에보다는 방콕이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전통적으로 작동했던 불교 네트워크도 활용할 수 있었다. 태국(타이)이 독립을 유지한 국가였다는 점도 한층 매력적이었을 법하다. 그 결과 1930년 출범한 인도차이나 공산당에는 정작 라오스와 크메르인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인도차이나연방 아래서도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여전히 '인도차이나'를 경험하기 힘들었다. 지도상의 행정 구역으로만 존재했을 뿐, 일상의 실감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프랑스를 업고서 관료 및 사업가로 군림하는 베트남인들에 대한 반감의 골만 깊어졌다. 베트남 좌/우파들이 프놈펜과 비엔타인(라오스 수도)을 누볐던 것과는 달리, 캄보디아와 라오스인들은 사이공과 하노이에 파견되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다. 양자 간의 비대칭성이 여실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유교화된 베트남과 인도/힌두화된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1000년의 유산만큼이나, 100년의 인도차이나 경험 또한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 차이가 1945년 이후 탈식민의 궤적을 추동하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된다.

 

그간 우리의 베트남 전쟁 인식은 미국 제국주의 대 베트남 민족 해방이라는 구도가 여전했다. 물론 그러한 면이 크다. 그러나 그것만은 또 아니었다. 어떤 인도차이나 질서를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경합하는 독립 국가파와 인도차이나파 간의 갈등도 심각하게 내연(內燃)했다.

 

그 이면을 살펴야 미국이 떠나고 나서 일어났던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1978년)과 중국-베트남 전쟁(1979년)까지 일이관지할 수 있다. (최소한 호치민 이후) 북베트남은 '인도차이나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코자 했던 '붉은 대남제국'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또 다른 면모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어 보겠다.

 

 

프레시안 : 2013-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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