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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105mm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렸다…지압 장군의 공세적 상상력이 적의 허를 찔렀다

비나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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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호찌민(왼쪽)과 지압(오른쪽). [중앙포토]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는 서사시(敍事詩)다. 베트남의 승전 드라마다. 베트남의 20세기 후반은 전쟁의 역사다.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중국과 싸웠다. 베트남은 강대국 모두를 물리쳤다. 연출자는 보 구엔 지압(Vo Nguyen Giap 武元甲) 장군이다.
 

1954년 프랑스 물리친 승전지, 베트남 디엔비엔푸를 가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첫 드라마다. 베트남과 프랑스 전쟁(1946~54년)의 하이라이트다. 그 승리는 기념비적이다. 피(被)지배 국가가 유럽 식민통치 국가를 물리쳤다. 제국주의 역사에서 처음이다. 승리는 의지의 산물이다. 바탕은 독립의 열망, 자주의 신념, 안보의 투혼(鬪魂)이다.

남중국해는 긴장이다. 미국과 중국은 맞선다. 베트남과 중국도 대치한다. 중국은 베트남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베트남의 안보투지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의 사드 배치 상황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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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는 낯선 곳이다. 베트남의 북서쪽 변방. 수도 하노이에서 300㎞(도로길이 450㎞) 떨어졌다. 이웃 라오스와 붙어 있다. 지난봄 나는 하노이에서 프로펠러 항공기를 탔다. 1시간15분 뒤 그곳에 착륙했다. 한적하고 좁은 공항이다. 도시는 아담하다(인구 10만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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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에 우뚝 선 승전 기념상(높이 12.6m). 56일간 전투 승리의 원동력인 ‘뀌엣찌엔 뀌엣탕’구호가 깃발에 새겨져 있다. 군인과 소수민족 타이(Thai)족 소녀. [사진 박보균 대기자]

 

도시 한복판 꼭대기가 시선을 끈다. 디엔비엔푸 승전 기념상이다. 나는 그곳부터 갔다. 입구는 조그만 광장이다. 꼭대기까지 300여 개 계단. 조각상이 서 있다. 숨을 몰며 올라온 사람들을 압도한다. 높이 12.6m, 폭 5m (무게 360t). 2004년 승전 50주년 기념작품이다.

조각상은 간결하다. 용사 세 명의 형상. 뒤쪽 군인은 기관총을 들었다. 앞쪽 한 명은 깃발, 다른 한 명은 어린 소녀를 들어올렸다. 소수민족 타이(Thai)족 아이다. 꽃다발을 쥐었다. 깃발에 새긴 글귀는 『』-. 결전결승(決戰決勝, 전쟁을 결심하면 승리를 결심한다) 구호다. 총(항전)과 꽃(평화), 그리고 투혼. 단순함은 강렬하다. 관광 가이드는 “뀌엣찌엔, 뀌엣탕은 호찌민(胡志明)의 신념이며, 지압 장군이 실천했다”고 했다. 호찌민은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다. 지압은 군 최고지휘관, 국방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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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산(愚公移山)의 거대한 조형물(길이 21m, 높이 14m). 디엔비엔푸 외곽 800m 산 중턱에 있다. 군인 30명이 밧줄로 105? 대포를 산위로 끌어올리는(한번에 30cm, 하루 50m) 장면을 묘사했다. [사진 박보균 대기자]

 

동상 아래로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디엔비엔푸는 무엉탄(Muong Thanh) 지방의 분지(盆地)다(길이 20㎞, 폭 6㎞ 평지). 산과 계곡에 둘러싸여 있다. 멀리 활주로(길이 1.8㎞)가 보인다. 계단 아래 길 건너편에 삼성전자와 LG 간판이 있다.

디엔비엔푸는 벽지다. 왜 결전의 장소가 됐나. 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항복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를 포기했다. 다음은 일본 지배다. 1945년 8월 일본은 항복한다. 프랑스는 재기했다. 미국·소련·영국의 힘이다. 그리고 인도차이나에 다시 진주한다. 그것은 식민지 복원이다. 역사의 치사한 퇴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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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벙커 옆 부조(浮彫). 승리 깃발을 흔드는 베트민군, 고개를 떨군 지휘관 드카스트리. [사진 박보균 대기자]

 

호찌민의 베트민(Viet Minh 비엣민, 월맹)은 45년 8월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 야욕에 맞서야 했다.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호찌민을 지원했다. 미·소 냉전이 시작됐다. 미국은 프랑스를 후원했다. 프랑스는 호찌민(군인 25만)의 게릴라 전략에 고전했다. 호찌민은 저항의 서사시적 투혼을 생산했다. “지금 메뚜기가 코끼리와 힘을 겨루고 있다. 하지만 내일이면 코끼리의 창자가 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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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 나바르 장군. [중앙포토]

 

53년 5월 앙리 나바르(Navarre 1898~1983) 장군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신임 인도차이나 주둔(44만) 사령관이다. 그의 전략은 유인·섬멸. 그 장소로 디엔비엔푸를 선정했다. 라오스(거리 35㎞)와 연결된 보급 요충지다. 53년 11월 20일 프랑스 공정대(空挺隊)가 디엔비엔푸를 급습했다. 낙하대원은 9000여 명. 알제리 외인부대원도 포함됐다. 나바르는 드카스트리(Christian de Castries) 대령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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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박물관 밀랍인형) 타이족 여성들은 당나귀로 식량을 운반. [사진 박보균 대기자]

 

나는 전승기념 박물관을 찾았다. 첫 전시물은 호찌민과 지압의 밀랍인형이다. 호찌민의 지시는 명쾌했다. “전선 사령관의 지휘권은 절대적이다. 승리를 확신할 때만 싸워라.” 호찌민은 최정예 5개 사단(4만9000명)을 투입했다. 지압을 전선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프랑스군은 7개의 진지를 구축했다. C-119 수송기로 대포와 탱크, 식량, 증원군을 공수했다. 비행장은 2차 대전때 일본군이 만든 것. 105mm 곡사포(24문), 155mm 야포(4문), M-24 채피 경(輕)전차(10대)를 배치했다. 병력 1만6200명. 전투기(F8F Bearcat)의 지원공격. 나바르는 화력과 기동력의 우위를 믿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확신했다. “적군이 몰려와 우리를 포위할 것이다. 적군이 평지로 나오면 요새는 고슴도치처럼 작동한다. 그때 섬멸적 타격을 한다. 주변은 산과 계곡이다. 적군은 중형 대포를 가져오지 못한다.” (마틴 윈드로우 저서 『마지막 계곡』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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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차로 개조한 자전거. [사진 박보균 대기자]

 

그것은 오판이고 자만이다. 지압은 상상력으로 맞섰다. 공세적 상상력은 적의 허(虛)를 찌른다. 리더십 상상력은 국민을 결속시킨다. 지압은 105mm 곡사포(무게 2t, 길이 6m)를 끌고 갔다. 비엣 박에서 300여㎞ 거리. 도로를 뚫고 다리를 놓았다. 뗏목, 거룻배도 등장했다. 되도록 밤에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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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의 망가진 M-24 경전차. [사진 박보균 대기자]

 

전시실은 그 장면을 연출한다. 진짜 대포와 밀랍인형 병사들. “디엔비엔푸 주변 높은 산은 800~1000m. 병사들은 대포를 밧줄로 묶어 한 번에 30~50cm, 하루 50m씩 끌어 올렸다.” 설명문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집념이다. 노랫말이 적혀 있다. “꼬렌!(힘내라) 산은 엄청나다. 우리 힘은 더 엄청나다. 계곡은 깊다. 우리의 분노는 더 깊다. 해뜨기 전에 대포를 산으로 끌자.” 인형들이 살아서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승패는 보급에서 판가름 났다.”- 전쟁사학자 찰스 슈래더(Charles.R. Shrader)의 진단이다. 그의 역작 『병참(兵站) 전쟁』(A War of Logistic, 2015년 펴냄)의 부제는 낙하산과 짐꾼. 짐꾼 인원은 3만3000명, 보급 수단은 자전거 2만 대. 양쪽에 대나무를 걸쳐 짐차로 개조했다. 자전거는 포대자루 네 개(최대 320kg)를 실었다. 식량(총 2만7000t), 탄약을 날랐다. 밧줄, 자전거, 포대자루, 삽, 곡갱이가 전시돼 있다. 진열품은 고난과 투지를 증언한다. 사병들은 자주 생쌀을 씹었다. 쌀밥 짓기가 힘들었다. 프랑스 정찰기는 연기를 추적했다.

54년 1월 하순. 지압의 부대는 디엔비엔푸 외곽에 도착했다. 산속에 숨었다. 산 위에 대포 진지를 마련했다. 우공이산은 눈부시다. 105mm 곡사포(36문), 75mm 대포(24문), 박격포(50문), 12.7mm 대공화기(36문), 소련제 다연장포(12문)가 포진됐다. 화력에서 우위에 섰다. 지압은 ‘신속 진격’에서 ‘점진 공격’으로 바꿨다. 그는 “그 변경은 힘든 결정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시점과 장소를 택해야 이긴다”고 회고했다. 은닉과 위장은 계속됐다. 프랑스군의 정찰 수색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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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로 대포를 끄는 베트민군. [사진 박보균 대기자]

 

3월 13일 지압의 첫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산 위에서 활주로에 105mm 대포(최대 사거리 11㎞)를 쐈다. 프랑스군 수송기 두 대가 파손됐다. 보병의 기습이 이어졌다. 프랑스군 북부 진지(베아트리스)는 무너졌다. 진지 명칭은 드카스트리의 애인 이름이다. 프랑스군은 충격에 빠졌다. 105mm 대포 출현을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전시실에 105mm 대포 실물이 놓여 있다. “디엔비엔푸 이전에 프랑스군으로 부터 노획한 미군 무기.”

프랑스군은 덫에 갇힌 신세다. 활주로 파괴로 이착륙이 어려워졌다. 낙하산 투하로 대체했다. 비와 구름에 가려져도 베트민군의 레이더 장착 대공포는 위력적이다. 프랑스군은 수송기의 고도를 높였다(2500에서 8500피트). 높은 고도의 낙하는 정확하지 않다. 드카스트리는 장군으로 진급했다. 그의 부인은 핑크색 축하편지를 보냈다. 그 자루는 베트민군 진지에 떨어졌다. 낙하산 공수(8만 개 투하) 작전은 실패했다. 프랑스 항공기(전투기, 수송기, 헬기) 손실은 62대.

박물관에 적힌 글귀가 눈길을 끈다. “승리의 원천은 나라를 지키려는 불굴의 의지다.” 한국 사회의 안보 불감증은 심각하다. 사드 배치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중국의 사드 반발은 거칠다. 중국은 한국을 무시한다. 경제보복 카드를 만지작댄다. 한국의 다수 정치인들은 눈치다. 중국 반응을 살핀다. 베트남의 단호함과 대비된다.

나는 마지막 격전지로 갔다. A-1 언덕(엘리안 2) 요새. 26일간 점령과 재탈환이 이어졌다. 지압의 군대도 사기가 떨어졌다. 참호전의 어려움, 죽음의 공포, 배고픔으로 사병들은 낙담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역전의 모멘텀을 만들지 못했다. 베트민군은 터널을 팠다. 요새 밑에서 800kg의 폭탄을 터뜨렸다. 프랑스군은 퇴각했다. 땅굴 폭파로 분화구 같은 구덩이가 생겼다. 그 옆에 전차가 전시돼 있다. 포신은 굽었다. 바퀴와 캐터필러는 망가져 있다. 미국인 관광객 제롬 필슨(59세)이 사진촬영을 부탁한다. 그는 “2차 대전, 한국전쟁에서 선전한 채피(Chaffee) 전차다. 이곳 우기(雨期)의 진흙탕에서 무용지물이었다. 프랑스군은 채피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했다.


5월 7일 최후의 돌격이다. 목표는 최고 지휘본부 벙커다. 사령관 드카스트리는 벙커에서 붙잡혔다. 그 순간이 새겨진 붉은색 조각상이 있다. 고개 숙인 사령관의 표정은 절망이다. 그것은 오만과 깔봄의 잔인한 대가다. 현장은 그 교훈을 격정적으로 표출한다. 나는 그곳에서 마틴 윈드로우의 책 『마지막 계곡』을 펼쳤다. “벙커 위 지압의 군대는 승리의 깃발을 휘날렸다. 그 장면은 21년 뒤 다른 형태로 재현된다. 75년 4월 사이공(지금 호찌민시)의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미군 헬기의 최후 탈출이 있었다.”

56일간 전투 드라마는 마감됐다. 프랑스군은 참패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식이다. 프랑스군 사망·실종자는 3400여 명, 포로는 1만1700명(부상자 4400명). 베트민군의 사망자 7900여 명, 부상자 1만5000명(프랑스의 추정 숫자)이다. 승리 다음날 5월 8일 제네바 회의가 열렸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포기했다. 하지만 나라 전체는 북위 17도선으로 분리됐다. 북부는 호찌민의 베트민(월맹), 남부는 월남공화국으로 나눠졌다.

◆보 구엔 지압(1911~2013)=20대에 신문기자와 역사교사. 30대에 호찌민(1890~1969)의 베트민(월남독립동맹)에 가세했다. 군 최고지휘관으로 프랑스·미국·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국방장관으로 60년~70년대 초 미국과 전쟁(73년 미군 철수)에서 이겼다. 75년 월남(남베트남)을 패망시켰다(통일 베트남). 79년 중국과의 전쟁 때 종합지휘를 맡았다.


중앙일보 : 2016-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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