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중국과 전쟁하면 승리한다...베트남이 중국을 다루는 법
▲ 1979년 중월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해방군 노병.
1979년 2월 17일 쉬스요우(許世友)와 양더즈(楊得志) 장군이 지휘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병력이 중국과 베트남 국경 지대를 2개 방향에서 남하해 침공했다. 탱크도 200여대 동원됐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실전(實戰)에 나선 것은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 처음이었다.
그해 1월 1일 중국공산당 지도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지미 카터 미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
“조그만 친구가 말을 안 듣는다. 아무래도 엉덩이를 좀 때려줘야겠다.(小朋友不聽話 該打打屁股了)”
불과 엿새 전인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한 사실을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 캄보디아 국경을 넘은 베트남군은 1979년 1월 7일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켰고, 중국이 지원하는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국외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베트남의 버릇을 가르치기 위한 침공에 나서기 직전인 2월 15일, 중국은 1950년 체결된 소련과의 우호협력 조약을 폐기한다고 선포했다. 1971년 닉슨 미 대통령의 안보보좌관 키신저가 베이징(北京)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세기의 회담을 한 이후 국제정세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급변했다. 중국과 소련이 동맹관계를 청산하는가 하면, 마침내 사회주의 중국이 사회주의 베트남에 ‘교훈을 주기 위한 제한전’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침공을 받은 베트남은 즉각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캄보디아로 보냈던 병력의 주력부대를 빼고, 베트남 중부와 남부에 있던 병력을 중국과의 국경지대로 급파했다. 중국·베트남 국경을 넘은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경 근처의 몇 개 도시를 점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개전 후 27일 만인 3월 16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돌연 “베트남 수도 하노이로 통하는 관문을 열어놓았으며, 베트남을 벌주기 위한 임무는 이미 완수했으므로 병력을 철수시킨다”고 선포했다. 중국군 당국은 이 전쟁에서 모두 6만2500명의 사상자와 550대의 군용차량, 115문의 포가 파괴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베트남군은 공식 희생자 수 발표를 하지 않았다. 중국군 추정에 따르면 베트남군은 5만7000명의 사상자와 7만명의 민병이 희생됐다.
27일간의 전쟁이 끝난 후 중국과 베트남 정부는 모두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 ‘교훈’을 주겠다고 중국군이 나선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는데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주둔은 1989년까지 계속됐다는 사실이다. 이를 보면 중국이 “엉덩이를 때려주고 교훈을 주겠다”고 나선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온 세계가 알게 됐다. 중국이 투입한 병력도 당초 발표된 20만명이 아니라 정규군 9개 군단, 30개 사단의 60만 병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기갑부대도 탱크 수백 대 규모가 아니라 수천 대의 탱크와 장갑차가 투입됐다고 베트남 측은 주장하고 있다.
中越전쟁은 철저한 실패의 전쟁
1979년의 중국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대표적인 중국 지식인들의 블로그인 ‘철혈망(鐵血網)’은 2013년 “중월전쟁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중국이 철저히 실패한 전쟁은 아니었던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철혈망은 다음과 같은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전쟁은 유혈의 정치요, 정치는 피가 흐르지 않는 전쟁이다. 1979년의 중월전쟁은 사회주의 중국과 사회주의 베트남이 벌인 전쟁으로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미국이 보는 가운데 일으킨 전쟁이었다. 철저한 실패의 전쟁이었다.”
중국이 베트남을 가르치기 위해 침공했다가 창피를 당한 경우는 190년 전 청나라 때도 있었다. 당시 베트남 왕인 완혜(阮惠·1753~1792)는 1788년 11월 25일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연호를 광중(光中)이라 했다. 청의 건륭(乾隆)제는 당시 20만 대군을 보내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그때도 1979년과 비슷한 결과가 빚어졌다. 청은 광둥(廣東), 광시(廣西),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등의 4개 성에서 20만 대군을 동원해 3개의 방향으로 나눠 베트남을 침공했다. 청군은 사령관의 지휘 아래 접경지대 세 방향으로 진격했다.
베트남 왕 완혜는 곧바로 수륙 양면에서 대군을 동원해 북진했다. 접경지대에 이르는 동안 전력을 증강해 10만 군사에 전투용 코끼리 100마리의 전력을 갖췄다. 그는 엄청난 속도전을 펼쳐 청군을 기습했다. 당시 20만 청군은 거의 전멸하며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패전 소식을 접한 건륭제는 즉시 내각관(內閣官) 복강안(福康安)을 양광(兩廣) 총독으로 임명하고 7개 성의 병마를 동원해 다시 베트남을 평정하도록 했다. 광시에 도착한 복강안이 사람을 베트남에 보내 먼저 사죄를 요구하자 완혜는 즉시 그에게 금은을 보내 남진을 저지하는 한편 조카 2명을 청조에 파견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요청했다. 건륭제는 이미 금은으로 매수된 복강안 등의 간곡한 제안에 따라 완혜 황제의 직접적인 알현을 약속받고 그를 안남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에 완혜 황제는 신하 중 자신과 용모가 비슷한 가짜를 내세워 건륭제를 알현하도록 했다. 가짜 안남 국왕이 중국 황제를 알현하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한 셈이다. 청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무력으로 베트남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에 가짜 안남 국왕의 알현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후대의 해석이다.
베트남은 939년 중국 대륙이 5대10국의 혼란기에 접어든 틈을 타 독립한 이후 명나라 때 일시적으로 식민지가 됐던 20년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식민지가 될 때까지 줄곧 독립을 지켰다. 베트남은 독립 이후에도 송, 원, 명, 청 등 중국 역대 왕조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으나 그때마다 마치 고양이 같은 앙칼진 성깔을 보여 중국 역대 왕조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중국의 체면을 구겨놓곤 했다.
▲ 중월전쟁을 지휘한 인민해방군 쉬스요우 장군.
청군 20만명 전멸, 치욕의 패배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중국해에서 중국 외교를 사면초가에 빠뜨리고 있는 골칫거리는 베트남의 반(反)중국 움직임이다. 베트남은 그동안 남중국해 일원의 해저 천연가스 개발과 영해 설정을 두고 중국과 신경전을 벌여왔다. 2011년 6월 13일에는 베트남 총리가 나서서 전쟁을 대비한 동원령 관련 법안에 서명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비록 즉각적인 동원령은 아니었지만, 베트남이 동원령을 준비하고 나선 건 1979년 중국과의 국경 분쟁 이후 32년 만이라는 점에서 중국을 긴장시켰다.
중월전쟁 당시 베트남 정부는 18~45세 국민에 대한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인구 8600만의 베트남은 45만명의 현역과 500만명 규모의 예비군을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과 중국의 갈등은 지난 2011년 5월 베트남의 자원조사선이 난사군도에서 작업 도중 중국 해양감시선의 방해로 작업용 케이블이 절단되면서 빚어졌다. 베트남 정부는 이후 “중국이 도발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미 항모의 베트남 기항을 허용할 것”이라고 발표해 중국 지도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베트남보다 중국의 신경을 더 건드리는 것은 일본이다. 일본 자위대는 2011년 미국의 중국에 대한 재개입(re-engagement) 전략이 발표되고 일본과 중국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해 갈등이 본격화되자 이른바 자위대 최강이라는 제7사단 병력 5400명, 1500대의 전차를 동원해서 원래의 주둔지이던 홋카이도(北海道) 지역을 떠나 일본 서남부 오키나와로 이동하는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일본 자위대 제7사단의 기동훈련은 일본과 동중국해에서 센카쿠열도를 놓고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일본 오키나와를 침공한 상황을 가상해 실시한 훈련이라는 점이 중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훈련은 전통적으로 러시아를 제1의 적으로 가상하던 일본이 주적을 중국으로 가상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중국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解放軍報)는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렸다.
“일본의 이번 군사훈련은 미국과 연관돼 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최근 일본은 새로 수정한 방위대강(防衛大綱)을 통과시켰다. 이 대강에는 ‘동태적 방어(動態防禦)’라는 구상이 처음으로 도입됐다. 동태방어 구상은 일본의 서남 해역에 대한 방어를 강조한 구상이며, ‘중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이전의 방위대강은 러시아와 북한을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이번 방위대강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중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의 동맹을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훈련은 중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최초의 대규모 훈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처음인 자위대 제7사단의 남부 기동훈련 실시 이외에도, 내년 초에 인도와 해상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양국 국방장관 사이에 이미 합의를 해놓았다. 또 필리핀과도 중국을 겨냥한 해상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회담을 진행해서 중국 외교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인도와 해상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한 일본의 움직임은 일본과 중국의 동중국해 분쟁 과정에서 중국 정부가 TV 등 전자제품 생산에 필수적인 희토류(稀土類·rare earth)의 일본 수출을 금지시키자, 일본이 또 다른 희토류 생산국인 인도와 수출 협상에 나서면서 시작된 것이어서 중국 외교부의 속을 끓게 하고 있다.
일본도 베트남도 중국의 군사적 침공과 외교적 공세에 대응할 수순을 갖추어 놓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의 사드(THAAD) 배치 반대 공세에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다. 우리는 중국의 사드 반대 제재 위협에 매에 놀란 닭처럼 뒤로 숨기만 할 것인가.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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