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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역사속의 인물 "호치민"

이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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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호치민을 기억하는 이유

 

9월의 끝자락에 서성거리며 다시 되묻는다. "우리에게는 왜 진정한 지도자가 없을까?" 대통령이라고 뽑은 사람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난 길을 가지 않고 틈만 나면 역주행이다. 청와대나 정부, 국회 자체가 사고다발지역이 된 듯하다. 이런 나라에 국가백년대계는 고사하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비전조차 있을리 없다.

 

지난 20여년 피 흘리며 쌓아온 민주주의와 통일의 탑은 집권세력이 휘두르는 칼에 와르르 무너질 판이다. 사방천지가 우리에겐 으르렁대는 외세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 오만하고 무능한 정권은 굴욕스러운 줄도 모르고 너스레 떨기에 바쁘다. 조국과 민족이 온전할 지가 의문이다. 정부와 여당이 백정이 됐다면 야당은 맞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우성치는 민중과 더불어 그나마 팔을 걷어 부쳤던 과거 야당의 모습은 이젠 찾아볼 수 없다.

 

hochimin_p.jpg 이 9월을 보내기 전에 39년 전 세상을 떠난 베트남 인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을 기억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우리 한민족이 무겁게 지고 있는 짐을 내려놓아야 하고, 조국의 완전한 해방과 통일의 길목에 가시덤불만이 뒤엉켜 있는 이 불행한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하기에. 100년이 넘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어떻게 우리처럼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제 나라를 포기하거나,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나라의 운명을 헌신짝처럼 내던지지 않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세계 열강에 맞서 싸워온 호치민의 삶과 투쟁을 뒤돌아보면서 우리 조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해법 역시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마음같은 것이다. 베트남의 역사는 가시밭길을 가는 우리 역사와 많은 부분 닮아 있다. 프랑스와 일본, 미국에 결사항전 한 베트남은 통일됐고, 일본과 미국에 짓밟혀 온 우리는 여전히 분단과 압제의 사슬에 칭칭 감겨있다.

 

 

▲ 불멸의 혁명전사, 호치민

 

 

호치민. 그는 죽어서도 아시아 피압박 민중들에게는 희망을, 총칼로 식민지 영토를 확장해 온 세계열강들에게는 충격과 좌절을 안겨준 불멸의 전사였다. 색 바랜 노동복에 왜소한 체구. 마른 발엔 언제나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었던 호치민. 그의 남루한 초상 앞에서 베트남 인민들은 왜 지금도 경배를 올릴 때면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우리에게는 왜 베트남 인민의 영웅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없을까"라는 쓰디쓴 독백과 그대로 이어진다.

 

호치민은 식민지로 피폐한 약소국 베트남의 60년 투쟁을 이끌었고, 30여 년 동안 베트남 민족해방운동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그는 베트남 현대사는 물론 세계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의 반식민지운동을 이끈 가장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호치민이 작은 체구를 던져 구하고자 했던 베트남의 근현대사는 외세 간섭으로 분열된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 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였다. 천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베트남 민족은 역대 중국왕조의 동화정책에 저항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100년의 프랑스 식민지정책에 대한 해방투쟁을 줄기차게 벌여왔으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궤멸한 새로운 식민지배자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45년 9월 호치민을 수반으로 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선언.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피로 물들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1946년, 전후 강대국 대열에서 탈락한 프랑스가 식민 지배국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노이·하이퐁 같은 대도시에 전면 폭격을 감행했다.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호치민은 잘라 말했다. "당신들 1명이 죽을 때마다 베트남인 10명이 희생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들은 패배할 것이고 우리는 이길 것이다." 호치민의 이런 자신감은 베트남 인민들의 전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세계 전사에도 기록된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프랑스가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무려 7년 반 동안 지속됐다.

 

항불전쟁 이후 호치민은 베트남의 확고부동한 지도자가 됐다. 그는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재건할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해방과 통일의 길은 열리지 않았다. 특히 인도차이나 반도를 전략 요충지로 삼았던 미국은 베트남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1955년 10월, 미국은 프랑스를 맹종하던 황제 바오 다이를 몰아내고, 고 딘 디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고 딘 디엠 정권은 온갖 실정과 부정을 저지르면서 민중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태생부터 친미 허수아비 이승만 정권과 판박이였다.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때부터 남베트남 정권은 계속되는 쿠데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혼수상태였다.

 

북베트남은 어땠을까. 호치민의 영도 아래 꾸준히 전재(戰災) 복구와 경제재건이 이루어졌다. 동시에 남베트남을 향해 정치·경제·군사 분야 협상을 여러 차례 제의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고 딘 디엠 정권은 거부했다. 친미정권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하고, 북베트남과 줄기차게 연계투쟁을 전개했다.

 

1964년 8월, 미국은 베트남을 침공했다. 남베트남의 위기는 북베트남의 공작이며, 남베트남의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수호한다는 것이 미국이 내세운 명분이었다. 미국은 침공이 정당하다는 근거를 남기기 위해 1964년 8월 2일과 4일 베트남 통킹만에 주둔 중이던 미군 구축함을 북베트남 어뢰정이 2차례에 걸쳐 선제공격했다고 발표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이를 근거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및 대규모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처음부터 북베트남 침공의 명분을 얻기 위해 조작된 자작극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미 국방성 비밀문서(The Pentagon Papers)에서 '34알파작전계획'에 따라 북베트남의 보복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미군이 먼저 폭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도화선이 된 '통킹만 사건'이다.

 

이를 빌미로 미군은 1965년 2월부터 전면 공습을 시작했고, 대규모 지상군을 베트남에 투입했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군 측 군대는 10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베트남 전역을 쉬지 않고 폭격했고 국토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이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쏟아 부은 폭탄의 양은 무려 900만 톤. 2차 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사용한 전체 폭탄의 양보다 많은 엄청난 물량공세였다. 이 전쟁은 베트남의 국경을 넘어 라오스와 캄보디아로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호치민이 이끈 베트남 군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살육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인가"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20년, 혹은 100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내 이길 것이다."라고 화답했다. 1968년부터 미국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 전쟁은 마침내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 100년에 걸쳐 베트남 군대는 프랑스, 일본, 미국 제국주의 군대에 맞서 고난에 찬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베트남 민중은 호치민의 놀라운 지도력 하에 승리했다. 사진은 1972년 5월 쾅 트리시를 점령하여 환하게 웃고 있는 북 베트남 병사들의 모습.

 

1975년, 생전에 호치민이 이끌던 군대는 사이공을 점령하고 괴뢰정부 남베트남을 무력화시켰다.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4월 30일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30년을 끌어왔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날이며, 남베트남이 해방된 날이다. 그리고 분단됐던 조국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을 이룬 역사적인 날이다. 베트남 민중이 프랑스, 일본, 미국 군대와 싸워 해방과 통일을 이루는 데는 1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세계 역사에서 이렇게 셋이나 되는 제국주의 나라와 싸워 이긴 예는 없다.

 

성조기를 앞세우고 싸운 전쟁에서 져 본 일이 없다는 미국 군대의 오만은 베트남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미국 군대는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정의의 편에 서지도 못했다. 무기보다 강한 베트남 민중의 신념이 제국주의를 물리치는 순간, 세계는 이 나라에 열광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제주주의 침략 근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이었던 까닭에 인류의 양심과 평화를 염원하는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 전쟁은 유럽의 68혁명에, 미국과 일본의 반전운동에, 남미의 변혁운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통일 베트남은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도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5천명 가까운 한국의 젊은이들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나라에 가서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과 싸우다 죽었고, 수 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미군 비행기가 뿌린 고엽제 때문에 뒤늦게 병상에 눕거나 유전병에 걸린 참전군인들도 숱하게 많다. 만약 베트남 참전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이들 참전병과 그 가족들은 가슴이 더욱 아플 것이다. 하지만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베트남 참전의 잘잘못을 덮어두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용맹하기로 이름난 '따이한 부대'가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민족해방전선 쪽의 피해는 오죽했는가. 게다가 우리 군대와 기업은 한국남자와 결혼해 살던 베트남 여성들을 모두 버려 두고 황급히 빠져 나왔다. "패전하고 떠난 침략군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 가며 자란 그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고 그 수가 3만을 넘는다고 한다. 슬픈 현실이다.

 

▲ 베트남 인민의 영웅 호치민은 아시아 피압박 민중들에게 불멸의 혁명전사로 아직도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영원한 인민의 벗, 호 아저씨

 

1969년 9월 2일 오전 9시 47분, 베트남 인민의 영웅 호치민은 거룩한 삶을 마쳤다. 아시아의 큰 별이 진 것이다. 자신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던 바로 그날, 정확히 24년 뒤 그의 심장이 멎었다. 4년 뒤 자신을 철석같이 믿고 따랐던 인민들이 세계평화를 짓밟아 온 미국을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는 죽어가면서 정치 보복을 하지말고, 자신이 어려울 때 많은 도움을 준 소수민족을 배려하라는 유언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지켜졌다. 적을 용서하고 소수민족을 배려하는 관용과 통합의 리더십은 오늘날 베트남을 지탱하는 힘의 원천이 됐음은 물론이다.

 

프랑스와 세계 최강 미국을 연이어 격퇴시킨 혁명가이자 불멸의 전사 호치민. 베트남 군대의 수장이자 국가의 최고 통치자였던 그가 남겼던 유품은 지팡이 하나와 옷 두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비롯한 몇 권의 책이 전부였다.

 

절망 속에서도 호치민의 지도력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격에 대한 인민들의 무한한 신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그의 오랜 투쟁 경력뿐만 아니라 호치민 자신이 보여주는 절제된 권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평생을 스스로 낮추고 검소한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다른 혁명지도자들과는 달리 '권력의 부패'에서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의 지도력은 베트남 인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그토록 강인한 지도자임에도 그는 언제나 따뜻했고 소박했다. 평생을 외세에 저항한 혁명가이면서도 39년이 지난 오늘 이 순간까지도 베트남 인민들로부터 이웃집 '호 아저씨(Bac Ho)'로 기억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을 믿고 줄기차게 투쟁하며 터득하고 단련해 온 품성 때문이었다.

 

낡은 외투에 달아 빠진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기꺼이 '인민의 벗'이 되었던 호치민. 그의 품에 안긴 어느 소녀가 그의 수염을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리는 데도 그저 웃고만 있었던 할아버지. 손녀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쭈그리고 앉아 아이에게 손수 음식을 떠 먹여주던 노혁명가. 노구를 이끌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병사들과 함께 모래주머니를 나르던 성실한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말했다. "위대한 지도자야말로 모든 인간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라고. 불행하게도 지난 100년 동안 우리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요동칠수록,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가 뜨거울수록 지도자의 빈자리가 크기만 하다. 이 나라에 다시 광기의 시대가 열리는 것 같다. 어디를 둘러봐도 아우성이다. 정권의 소총수가 된 완장부대는 왜 이리도 많은지. 이 가을, 호치민이 더욱 그리워진다. 우리 가슴에는 왜 이리 찬바람만 쌩쌩 부는가.

 

 

[출처 : 이종용과 함께하는 우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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