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문 외국근로자 한국어시험 '있으나 마나'
산업인력공단이 베트남·몽골 등 현지서 시행
뜻 몰라도 맞힐 수 있는 문제에 감독도 엉망
합격해도 90% 말 못해… "시험 재정비 절실"
지난 10일 베트남 하노이 한복판의 V어학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학원 관계자가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광고전단의 '한국어능력시험 대비반'문구가 인상적이다.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냐"고 물으니 "물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현지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한국인에게 베트남어를 가르치기도 하는 이 학원에서는 현지에서 치러진 한국어능력시험(EPS-KLT) 기출 문제지 원본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역시 하노이 시내에 있는 E학원도 마찬가지였다. E학원에서는 제본한 기출문제를 미화 2달러 정도에 판매하고 있었다. E학원 관계자는 "시험장에서 문제지를 회수하지 않기 때문에 기출문제는 쉽게 구할 수 있다"며 "문제도 공개된 문제은행 2,000개 안에서 똑같이 출제되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고 했다.
고용노동부 산하 한국산업인력공단이 국내 취업을 희망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해당 국가에서 실시하는 한국어능력시험의 출제와 기출문제 관리, 시험 감독이 극히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30일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고용노동부는 올해 외국인 노동자 도입규모를 당초 2만4,000명에서 1만명 더 늘리기로 한 상태여서 이들 인력을 걸러내는 거의 유일한 장치인 한국어능력시험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해 보인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어능력시험의 변별력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2008년 발행한 '고용허가제 한국어능력시험 문제은행'과 V학원, E학원이 갖고 있는 기출문제는 각 문제의 보기(①②③④)가 순서 하나 바뀌지 않고 똑같았다. 공개된 문제를 구해서 정답을 외우면 내용을 전혀 몰라도 답을 맞힐 수 있는 것이다.
시험 관리감독도 매우 허술하다. 하노이에서 한국어능력시험 감독을 직접 경험했다는 김모(42)씨는 "산업인력공단에서 나온 한국인 감독은 1~2명뿐이고 현지에서 아르바이트로 고용된 한국인들이 복도감독을 선다"며 "교실 안에 있는 현지인 감독들은 수험생에게 매수된 경우도 있어 복도감독관인 한국인이 나타나면 커닝중인 수험생들에게 오히려 이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른 적이 있는 현지인 H(35)씨는 "먼저 시험을 치른 수험생이 나와서 휴대폰으로 답을 찍어주는가 하면 한국어를 잘 하는 학생이 문제지에 답을 표시해 옆자리 학생들에게 직접 보여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베트남 노동보훈사회부는 올 4월 25일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른 수험생 가운데 시험장에서 휴대폰을 소지하고 있던 30명, 대리시험을 치른 1명, 커닝을 한 2명 등 33명의 부정행위자를 적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브로커를 통한 대리시험도 적지 않다는 현지인들의 증언이다. 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베트남 동라이(호치민 남쪽 150km)지역에서 한 여성이 한국 입국을 준비 중인 현지인 구직자들에게 전화해 한국어능력시험을 통과시켜주고 출국을 보장하겠다며 돈을 요구했다. 신고를 받은 산업인력공단측은 베트남 해외취업센터(OWC)에 이 사실을 알려 현지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으나 '대포폰'을 이용한 탓에 범인을 색출하지 못했다.
중국, 몽골, 인도네시아 등 다른 나라들에서도 사정은 비슷한 것으로 전해졌다. 고용허가제로 한국에 입국했다 최근 베트남으로 돌아온 L(25)씨는 "이들 나라에서 온 노동자 가운데 브로커에게 원래 비용의 10배 이상을 지불하고 한국어시험도 직접 치르지 않은 채 고용허가를 받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총체적 부실은 국내에서 외국인노동자와 고용주간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입국한 외국인노동자가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거나, 시험성적에 따라 고국에서 전혀 일해보지 않은 분야의 고용허가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 권익단체의 한 활동가는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노동자 9할 이상이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어능력시험 비용이 현지인에게 부담이 되는 수준인데도 응시자격에 아무런 제한이 없는 반면, 고용허가는 극소수에 불과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올해 한국어능력시험 응시료는 미화 17달러로 3만571명이 접수해 산업인력공단은 51만9,707달러(한화 6억1,689만원 상당)를 벌어들였다. 합격자는 1만678명(합격률 36.5%)에 이르렀지만 실제 한국에 입국한 사람은 올 상반기 1,230명에 그쳤다.
한 교민은 "하루 시험 감독을 위해 50여명이 출장을 와 일주일 동안 1인당 최소 150만원 이상의 경비를 써가며 관광을 하다 돌아간다"며 "산업인력공단이 빈국 저소득층의 고혈을 짜먹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산업인력공단 관계자는 "시험장에서 엿보기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올해부터는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겠다"며 "작년부터는 일부 국가에서 기능테스트를 시범 도입해 변별력을 높이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 2010/08/16 02: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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