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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문 [태광실업 성공스토리] 박연차 회장의 도전·끈기…‘베트남 국민기업’으로 우뚝

비나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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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지난 10월 박연차 태광실업그룹 회장(오른쪽)이 태광실업의 베트남 현지 신발공장 태광비나를 방문한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를 영접하고 있다. [사진 제공 = 태광실업그룹]

베트남 남부의 경제수도 호찌민에서 차로 40여 분을 달리면 동나이성 비엔호아에 자리한 태광실업의 현지 신발공장 태광비나가 나타난다. 지난 10월에 이곳에 '귀빈(貴賓)'이 발걸음했다.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총리가 박연차 태광실업그룹 회장을 만나기 위해 직접 공장을 찾은 것이다. 마이띠엔중 총리실 장관과 응우옌티응이아 교육부 차관, 응우옌번아이 문화부 차관, 부오비반끄엉 총노동위원장 등 각 분야 주요 인사들도 동행했다.

베트남 총리가 정부 인사들을 대거 이끌고 외국 투자기업을 방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현지 언론들도 응우옌쑤언푹 총리의 '깜짝 방문'을 비중 있게 보도했을 정도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국민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태광실업의 위상을 생각하면 총리의 방문이 그리 놀랍지만은 않다는 분위기다. '베트남에서 애플은 몰라도 태광실업은 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그 위상이 높기 때문이다. 태광실업 전체 매출은 베트남 진출 초기인 1994년에는 약 35억원에 불과했지만 지난해는 1조5588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이 가운데 70%가 베트남 법인에서 나올 정도로 이곳의 역할이 크다. 현지 고용 인원은 진출 초기 1만여 명에서 지난해 7만여 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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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태광실업이 베트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베트남 경제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면서도 현지 사회와 상생하는 기업 모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총리가 태광비나를 찾은 것도 노사관계 대표 우수기업으로 선정된 것을 축하하고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남딘 발전사업 등 태광실업의 다양한 신사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도 약속했다. 응우옌쑤언푹 총리는 "태광비나는 5만명 이상의 고용 창출은 물론 훌륭한 노사관계를 가꾸어 온 베트남 투자기업 가운데 가장 모범적인 기업"이라며 "앞으로 베트남의 국민기업으로 성장해 달라"고 당부했다 

최근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시장인 베트남에서 태광실업은 해외 진출 기업 모범 사례로 불린다. 오늘날의 '성공신화' 뒤에는 위험을 감내한 경영자의 '도전'과 수많은 시행착오를 버텨낸 '끈기'가 있었다. 태광실업은 1994년 국내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베트남에 진출했다. 당시 국내 신발산업은 비싼 인건비로 위기였다. 특별한 돌파구가 필요했던 시점에서 박 회장은 인건비가 낮은 베트남으로 눈을 돌렸다. 베트남전쟁 때 2년간 파병생활을 하며 현지 인력의 근면성과 저렴한 인건비를 확인한 것도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신발이 사양산업이라며 해외 진출을 만류했다. 박 회장은 "사양기업은 있어도 사양산업은 없다"며 도전했다. 

당시 회사 간부들은 해외기지로 우리나라와 가깝고 개방화에 나선 중국을 선호했다. 하지만 박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베트남이 국민성이 선량한 데다 아열대 지방의 다른 국가와 달리 부지런하고 단결력이 강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간부들을 설득해 베트남에 해외생산기지를 구축하기로 결론을 내리자 그는 바로 실행에 나섰다. 1992년 박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이 수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방문했다. 적합한 지역을 선별하는 작업에도 철저한 준비와 검토 과정을 거치면서 1년이 넘게 걸렸다. 이후 1994년 동나이성 비엔호아시 산업구역에 제1호 해외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이 바로 '태광비나'다. 태광비나는 베트남 개방 이후 국내 기업이 진출한 첫 해외법인으로 해외투자 1세대 기업에 속한다. 

설립 초기에는 베트남의 열악한 인프라 때문에 공장 운영이 쉽지 않았다. 당시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 기업은 독일과 호주의 중소기업뿐이었다. 규모가 큰 공장을 설립한 것은 태광실업이 최초였다. 열대를 방불케 하는 더운 날씨 속에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베트남인들과 공장을 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전기는 발전기를 한국에서 가져와 해결되었지만 물을 해결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처음엔 회사에서 천공할 계획도 세웠지만 농업용수를 파이프로 연결해 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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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을 준공하기로 한 날짜는 다가오는데 공사 진척도는 너무 느렸다. 포클레인 등 건설장비가 없어 토목공사부터 모든 일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베트남은 자본주의를 수용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행정 처리나 일하는 태도가 사회주의 방식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잔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야근수당을 주겠다고 해도 오후 4시만 되면 모두 퇴근했다. 박 회장은 고민 끝에 베트남 인부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공기 안에 일을 끝내주면 인센티브 5만달러를 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한 달 월급이 40달러이던 시절이니 5만달러면 수십 명이 나눈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이날부터 야근수당도 마다했던 인부들이 밤이 되자 스스로 불을 밝히고 밤낮없이 일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공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공기 안에 무사히 공사를 끝냈다. 

공장 운영 초기에는 한국 파견직원들과 현지직원 간 마찰도 있었다. 주로 언어소통의 문제였다. 특히 문제는 생산파트였다. 생산부 직원들은 영어를 전혀 못하는 직원들이 많아 소통이 더 어려웠다. 부서 단위로 통역인을 모집해 운영했다. 공장을 가동한 후에는 국내 베트남어학과 졸업생을 특별 채용해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인 파견 근로자들에게도 베트남 문화와 현지인 이해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될 수 있으면 현지인들을 많이 칭찬해주고 잘못하더라도 화내지 말고 천천히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는 인내심을 기르도록 했다. 

이후 베트남 인력들은 태광비나를 글로벌 '신발의 메카'로 만드는 일등 공신이 됐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은 진심으로 박 회장을 따랐다. 베트남이 발전하면서 태광실업도 함께 '훨훨' 날기 시작했다. 공장 가동 1년 반 만에 태광비나는 흑자로 전환했고, 3년 만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했다. 385억원의 투자비에 직원 1만명으로 출발한 태광비나 제1공장은 지난해 3만7000명 고용과 670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박 회장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2009년에는 제2공장인 베트남목바이를 건설했고 지난해 제3공장 착공식을 가졌다. 제3공장인 껀터 공장은 62만㎡(약 19만평) 용지에 1억7000만달러(약 2000억원)가 투입될 '메가팩토리'다. 전체 공장 가동 시 3만5000명의 고용과 약 5000억원의 연매출이 예상된다. 세 공장이 모두 가동되면 태광은 베트남에서 하루에만 23만켤레의 신발을 생산하게 된다. 태광실업 관계자는 "1, 2, 3공장을 모두 운영할 경우 베트남에서만 8만7000명을 고용하고 연매출은 1조350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매일경제 : 201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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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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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이면 엄청 열악했을텐데.. 선견지명이 있으시네요.
11:31
17.12.05.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네요
12:20
17.12.06.
한국에선 범죄자 벳남에선 영웅??
14:48
1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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